[피플인사이트] 영 셰프 해외 키친 경험기

하얀 도화지를 때로는 강렬한 색채로, 혹은 옅은 색으로 칠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텅 빈 여백으로만 남길 수도 있다.

 

인생을 그림 그리듯 살아가는 김정호에게는 모든 색과 형태가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 반복되는 일상이더라도 훗날의 의미를 기약하며 묵묵히 즐기자고 말하는 그는 오늘도 그렇게 주방에서의 하루를 그려나간다.

 

우연히 시작된 꿈

 

어렸을 적부터 떡볶이를 좋아해 집 냉장고에는 항상 방앗간에서 뽑아온 가래떡들이 가득했다. 종종 매운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야! 기가 막히게 맛있네!’ 하며 즐거워하는 친구들 반응을 보면 기쁜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즐거운 순간에는 언제나 음식이 함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렴풋이 예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등교 전 새벽에 학원에 나가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대학도 조리학과로 진학했다.

 

최고의 요리학교에 가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미국 알래스카에 있는 레스토랑에 인턴십을 나가게 되면서 내 앞에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각자 소중한 꿈을 안고 모인 다양한 국적의 청년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더 넓은 무대에서 배움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결국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자퇴를 말렸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과감히 결정을 내렸다.

 

그 후 미국 오하이오주의 시골 마을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언어 공부에 매진했고 외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문화에 스며들려고 노력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듣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작정 마을에 있는 대학교에 가서 수업도 듣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인 2011년. 드디어 목표로 삼았던 요리학교, CIA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우려 속에 내린 자퇴라는 큰 결정이 긍정의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실전처럼 진행되는 CIA수업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여러 친구들과 교류하며 좋은 경험들을 쌓아갔다.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모이는 뉴욕에서 요리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각종 푸드 페스티벌도 경험하고, 뉴욕의 유명한 레스토랑을 탐방하면서 요리에 대한 시야를 넓혀나갔다.

 

도전의 가치

 

CIA를 다니면서는 최대한 많은 레스토랑에 스타주를 지원하려고 노력했다. 캐주얼 다이닝부터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까지 다양하게 경험해보고 싶었다. 특히 뉴욕에는 낡은 건물에서 오래된 레스토랑들이 많이 운영되고 있는데, 현대식 주방은 아니지만 요리와 서비스는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벽하게 갖춰진 곳보다는 조금 부족한 듯한 그런 환경에서 견습 경험을 한 것이 오히려 다양한 상황 속에서의 대처 능력과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키워준 것 같다.

 

 

스타주를 통해서 얻은 경험은 앞으로 내가 나아갈 목표와 방향을 세우는 데 큰 힘과 자산이 되었다.

특히, 요리사라면 누구나 겪는 ‘어떤 요리를 할까, 어디서 일할까, 이 직업이 나랑 맞나?’ 등의 고민에 대해서 일찌감치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졸업 후 취업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침 뉴욕의 프렌치&이탤리언 퀴진 레스토랑으로 미쉐린 스타를 받은 <아이피오리AI FIORI>에서 제안을 받았고 곧바로 스타주 일정을 잡게 되었다.

 

손님을 위한 셰프

 

첫 출근날부터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는데, 몸은 힘들었지만 무척 신나고 느낌이 좋았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어깨너머로 선배 요리사들이 재료를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다양한 파스타 메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이제껏 원하고 바라왔던 스타일의 레스토랑임을 느꼈다. 그날 마지막 접시가 서빙되고, 서비스를 모두 마친 후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가 나를 따로 불렀다.

 

“킴. 어땠어? 할 만해?”라고 물었고 나는 곧바로 “Yes, Chef!”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자 내 어깨를 두 번 치고 나가더니 잠시 후, 레스토랑 근로계약서를 들고 왔다. 예상 밖의 높은 급여와 새로운 파트에서의 근무 조건이었다. 제안을 듣고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일은 이전과 달리 조리부터 플레이팅까지 모두 맡으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혼도 많이 났다.

 

주방에서 셰프에게 지적받고 혼나는 와중에도 손님들의 오더가 접수되는 벨 소리는 계속 울렸고, 당장 눈앞에 해결해야 할 요리들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년 중 가장 바쁜 ‘레스토랑 위크’를 진행했을 때는 정말 속되게 표현해서 ‘더럽게’ 많이 혼났다.

그날 일을 마치고 피웠던 담배와 라임을 넣은 병맥주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고생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도 났다. 왜냐면 점점 더 익숙해지고 나아지면 언젠가 더 이상 지적받지 않게 될 날도 반드시 올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인사

 

몇 개월마다 바뀌는 메뉴와 바쁜 주방 생활에 적응할 때 즈음, 레스토랑에서는 비자 연장을 지원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회사에서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도 큰 의미가 있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한국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이피오리>를 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인연들을 만났다.

 

돌이켜보면 나의 짧은 요리사 인생에서 이때만큼 서비스할 때 등을 타고 흐르는 땀에서 희열을 느낀 적이 또 있었나 싶다. 일을 모두 끝마치고, 처음으로 손님 자격으로 앉아서 식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모든 홀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코스별로 요리를 내어주며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코스마다 함께 일했던 시간과 정이 느껴져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식사가 끝나고, 잠깐 주방에 들어가서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주방에 들어서자 그동안 함께 땀 흘리고, 욕하기도 하고, 정을 나누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동료들이 “Kim!”이라고 외쳐주니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슬픈 마음이 들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내가 식사했던 테이블로 돌아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그날 나의 식사 계산서에는 금액 대신 ‘Great Job, Kim. See You again. Thank you so much’라는 메모만 적혀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고 그날의 식사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도 훗날 꼭 훌륭한 셰프가 된다면 직원들에게 이런 감동을 주는 작별 인사를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인간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

 

한국에 돌아와 일을 하다 보니, 미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식재료가 상당히 비싸고 또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활용해 나만의 요리 세계를 표현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이 오픈할 때, 당시 호텔 내 최연소 주임 및 오픈 멤버로 입사 제의를 받았고 도전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포시즌스 호텔에서는 경험 많은 선배들 밑에서 체계적인 오픈 준비를 배울 수 있었고 레스토랑의 메뉴 개발과 시스템 구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외에도 여러 이벤트와 프로모션 등에 참여하면서 ‘성공적인 호텔 오픈 멤버’ 표창장과 ‘우수직원상’을 받는 행운도 누렸다.

이후에는 <레스토랑 오세득>에 합류하여 한국의 파인 다이닝을 경험해볼 수 있었고 레스토랑의 운영과 경영, 직원 교육과 인사 담당 등 요리 이외의 것들을 배워나갔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셰프가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요리 말고도 경영이나 여러 업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편안함이라는 매력

 

그러던 중, 나의 요리 가치관이 바뀌게 된 계기가 생겼다. 우연히 재능기부 취지로 참여했던 서울시 상생상회 프로그램 ‘금요미식회’에서 참새우와 참가리비를 기존의 조리법에서 벗어나 새롭게 양식 스타일로 풀어낸 메뉴를 준비했는데, 젊은 사람들부터 부모님 세대의 어르신까지도 모두 즐기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다양한 고객을 아우를 수 있는 대중적인 요리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특별한 날에만 찾는 파인 다이닝이나 럭셔리를 추구하는 레스토랑이 아닌, 대중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면서 가격과 맛 그리고 서비스까지 훌륭한 레스토랑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긴다면 내가 이제까지 몸담고 경험해왔던 방식과는 조금 다른 서비스를 시도해보자고 생각했다. ‘집밥이 최고’라는 말처럼 집밥처럼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특별한 요리를 제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2019년부터는 종로 서촌에 위치한 비스트로, <제이엘리J.ALLEY>에서 경영 자문과 메뉴 개발에 참여하며 총괄 셰프로 일하고 있다.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손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것. 과거 파인 다이닝에서와는 달리 다양한 영역과 연령대의 손님들이 찾아올 수 있고, 그들과 친근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진심 어린 정성을 들이며 맛있는 요리를 낼 수 있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 김정호​

 

"아직까지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국내외 유명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쌓은 폭넓은 조리 경험과 고객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서비스를 잘 적용해나간다면 곧 훌륭한 결과물을 이뤄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여러 손님들과 음식에 대해 소통했던 것을 바탕으로 수정을 거쳐서 다양하고 재미있는 F&B 사업을 해보고 싶다.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내가 배워왔던 3가지. 바로 직원 중심의 운영, 요리를 통한 재능기부 그리고 사람들에게 즐겁고 편안한 다이닝 경험을 주는 것이다."

 

1988년생. CIA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미쉐린 레스토랑 <아이피오리>에 서 근무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로는 포시즌스 호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부티크 외식 브랜드를 거치면서 경험을 쌓았고, 2019년부터 서촌의 비스트로 <제이엘리>에서 경영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 콘텐츠는 레스토랑, 음식, 여행 소식을 전하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바앤다이닝'과 식품외식경영이 제휴해 업로드 되는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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