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를 너무 얇게 빚으면 빨리 말라버려요. 최소 7cm 이상 두툼하게 빚어야 장맛이 좋아진답니다.” 상하농원 발효공방 양혜영 고문의 설명에 따라 참가자들이 고슬하게 익은 파주 장단콩을 손으로 치대며 메주를 빚고 있다. 말랑말랑한 콩에서 구수한 향이 솔솔 퍼진다. 고창 상하농원에서 진행된 장 체험 프로그램 현장이다.
일 년에 한 번, 전통 장을 담그자는 고창의 농원
전북 고창은 좋은 장을 담그기 위한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고창 땅에는 돌을 심어도 감자가 난다’ 할 정도로 미네랄이 풍부한 황토는 콩을 포함한 각종 농산물을 무럭무럭 길러내고, 우수한 옹기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
장맛의 기본인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는 청정 갯벌도 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염전을 만든 지역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예부터 명성이 높았다. 서해안 해풍과 따뜻한 햇볕, 맑은 공기 등 장이 맛있게 익어갈 청정 환경도 완벽하다.
이렇게 장맛 좋기로 유명한 고창에서 3월 18일부터 1박 2일에 걸쳐 ‘장 체험과 함께하는 지속가능한 미식 여행’이 진행됐다.
상하농원과 SSG닷컴이 함께 기획한 이 행사는 상하농원 발효공방에서 장인의 가르침에 따라 직접 장을 담그고, 힐링 스파와 건강한 조식을 갖춘 파머스빌리지에서 하룻밤 묵으며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날 행사에는 한식 인문학을 연구해온 정혜경 호서대 교수, 조희숙 <한식공방> 셰프, 강민구 <밍글스> 셰프 등도 참석해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상하농원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젖소와 양이 사이좋게 뛰노는 너른 잔디밭과 붉은 벽돌 건물이 어우러진 목가적인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일유업이 고창군, 지역 농민들과 협력해 만든 유기농업법인이자 체험 목장인 상하농원은 2016년 정식 오픈하기까지 준비 기간만 8년 걸렸다.
건물 디자인을 비롯해 상하농원 전반에 대한 디렉팅은 건축가가 아닌 현대미술 작가 김범이 맡았다. 작가가 그린 목가적인 풍경을 따라 푸른 초원과 밭, 호수, 건물들이 공들여 조성돼 그림 같은 풍경이 현실로 이뤄졌다.
젖소 한 마리당 916m2의 초지를 마련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유기농 우유 생산 조건을 갖추는 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자연의 선순환 고리를 형성하는 유기농 유제품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고창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각종 먹거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유제품 공장에 이어 전통 장을 빚는 발효공방을 비롯한 다섯 곳의 공방이 상하농원에 마련됐다. 이곳들이 식품 가공을 넘어 바른 먹거리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체험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상하농원은 6차 산업의 우수 모델로 우뚝 떠올랐다.
메주의 운명은 이틀 안에 결정된다
발효공방의 양혜영 고문은 상하농원이 초빙한 고창의 전통 장 전문가다. 고창의 친환경 대두부터 제주 푸른콩, 파주 장단콩까지 전국의 토종 콩을 1백50여 개의 항아리에 전통 방식 그대로 담가 다양한 전통 장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때 건강이 악화돼 채소 위주의 자연식으로 몸을 치료하면서 전통 장의 효험을 몸소 경험한 그녀는 이후 10여 년간 전통 장과 사찰 음식을 공부해왔으며, 2014년부터 상하농원 발효공방에서 전통 장 연구를 돕고 있다.
양 고문은 간장과 된장을 “오랜 발효 끝에 얻는 고품질의 채소 단백질 공급원”이라고 소개하며 “장 담그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메주”라고 강조했다. 이날 준비된 콩은 파주 장단콩. 16시간 불린 후 가마솥에서 4시간가량 삶은 콩은 그 자체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삶은 콩은 알알이 참가자들이 손으로 메주를 네모지게 빚었다. 이후엔 짚으로 묶어 선선한 곳에 매달아 8-10주간 띄우는 과정을 거친다. 시원한 해풍이 불어오는 고창은 발효에 최적인 환경. 양 고문은 “메주의 운명은 이틀 안에 결정된다”고 말했다.
“이틀 뒤 만졌을 때 눅눅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요. 햇볕에 말리거나 선풍기 바람에 말리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하죠. 메주 무게의 40%가 빠질 때까지 자연 건조해야 합니다.”
당일 참가자들은 미리 공방에서 잘 띄운 꾸덕한 메주로 장을 담갔다. 고창 옹기 속에 메주를 60% 정도 쌓은 뒤, 염수를 가득 붓고, 숯, 솔잎, 대추, 건고추 등을 대나무로 고정했다. 양 고문은 “메주를 지그재그로 쌓아야 물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팁도 잊지 않았다.
염수는 3년 간수를 뺀 고창산 소금을 적정 염도로 맞춘 뒤, 목장의 촘촘한 유청거름망으로 걸러 티 없이 맑았다. 이제 깨끗한 공기와 따스한 햇볕, 시원한 해풍을 품은 고창의 자연이 잘 숙성시켜주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참가자의 명패가 달린 항아리는 45일 후 장 가르기를 거쳐 1년 간 발효되면 된장과 간장으로 완성돼 개별 방문이나 택배 발송을 통해 참가자들에게 전달된다.
류영기 상하농원 대표는 “한국 슬로 푸드가 주는 건강함과 시대적 화두인 팜투테이블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면서 “향후에도 제철 미식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미식 큐레이션 프로그램을 추가로 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