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공단은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대규모 산업단지이다. 하루 종일 무거운 컨테이너를 산적한 트럭들이 분주히 단지를 오간다.
입주기업만 10,000개사에 이르는 이곳에 공단 조성 초창기부터 영업을 하고 있는 고깃집이 있다. 일명 시흥 아재 맛집이라 불리는 ‘사또화로구이’가 그 주인공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14년간 자리를 지켜온 최정환(55세) 대표의 비결을 들어봤다.
외식 서비스 기본 다진 사회 초년기
최 대표는 80년대 후반 호텔 웨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호텔에서 정식 서비스 교육을 받으며 손님 응대, 서빙 시 예절 등에 대한 개념을 기초부터 탄탄히 다졌다. 당시 우리나라 외식산업은 성장기로 넘어가던 터라 제대로 된 서비스 매뉴얼이 정립된 시기는 아니었다.
호텔 퇴사 후 일식집 조리장 소개로 강남에 있는 횟집에서 일하며 일반 외식업계에 입문했다. 당시 최 대표가 일하던 매장 옆에서는 한 일식 외식업체의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 중간 점심 식사차 횟집을 찾아오면 일본인 통역을 도와주곤 했다. 오픈을 앞둔 일식당에서 최 대표에게 함께 근무할 의사가 없는지 물어왔다.
“이직을 제안받은 회사는 1세대 정통일식우동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기소야’였다. 당시 일본과 합자회사로 출범해 정통일본식 우동을 선보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풍요롭지 않던 한국 외식 문화를 끌어올릴 것이라 판단해 합류했다.”
서빙을 하는 직원부터 주방장까지 대부분 일본인으로 인력이 구성된 기소야에서 그렇게 최 대표는 점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외식업의 희열 맛본 기소야 초창기
점장으로 근무한 지 4개월이 넘었을 때 주방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는 권유받았다. 요리에 대한 경험이 없었지만 외식인으로 한 단계 올라설 기회라 여겨 제안을 승낙했다. 능숙한 홀을 벗어난 후는 그야말로 고생길 시작이었다.
“손가락 베이는 건 물론 일본인 주방장과 소통 문제로 실수를 하기도 했다. 주방에 들어가고 6개월은 밤 10시까지 남아서 요리 연습을 했다. 힘들 때 포기를 떠올리기보단 ‘이런 걸 내가 왜 못해!’라며 오기로 버텼다.”
지금은 일식 문화가 대중화됐으나 당시는 생소하던 시기였다. 한 그릇에 800원짜리 우동을 팔아 하루 매출 만 원밖에 올리지 못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한번 매체를 통해 기소야 브랜드가 노출된 후로 매출이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20명의 직원이 브레이크 타임에도 밀려드는 손님으로 쉴 시간조차 없었다. 포스도 없던 시절 일일이 장부에 기록하며 손님을 맞았다. 60평 규모에서 일 최고 매출 2천만 원을 올리며 대박이 났다.
“오픈전부터 매장 앞에 손님이 줄을 서고 있었다. 직원들과 호흡을 맞춰 성과를 내니 몸은 피곤해도 에너지가 넘쳤다. 이때 외식업의 희열을 처음 맛봤다. 남은 면이 아까워서 직원들과 김치찌개에 넣어 먹던 것을 개발해 김치나베우동을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95년도까지 기소야에서 일하며 홍대 등 체인점 13개를 오픈시켰다. 초창기부터 기소야 기본 틀을 만든 최 대표는 개인 사정으로 외식업을 떠나게 된다. 잠시 돈까스 전문점에서 점포·식자재 관리를 담당하다 2003년 지인에게 동업 제안을 받고 시흥으로 내려왔다.
시흥 양념갈비 맛집, 사또화로구이
시화공단 상권 특성에 맞게 동업자와 24시간 영업하는 삼겹살 매장을 2년간 운영하다 2005년 양념 돼지갈비 전문점 ‘사또화로구이’를 오픈했다. 죽어있던 상권에 대형 고깃집이 생기자 초창기부터 손님이 몰렸다. 대기표를 50번까지 뽑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성공에 힘입어 2009년에는 소고기 전문점 ‘온달장군’, 다음 해에 ‘물왕버섯농원’이라는 샤브샤브 매장을 차례로 열었다.
“현장 경험은 많았지만 외식 경영을 하는 것은 또 달랐다. 혼자서 하기보단 각 분야 전문가들과 지혜를 모아서 사업을 전개했다. 우선 지역 특성에 맞게 메뉴를 선정했다. 그다음에 음식 전문가와 함께 메뉴를 개발하며 의견을 조율해 갔다. 손님은 한 단계 아래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스스로 ‘진짜 맛있네.’라는 평가가 나올 때까지 맛을 연구했다. ”
서비스 교육은 호텔 서비스 경력을 살려 최 대표가 실시하고 있다. ‘홀은 입으로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직원이 잘못한 점은 일대일로 있는 상황에서만 이야기하고 손님에게 해야 할 표현, 스킨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리는 만드는 것으로 끝이 아닌 손님이 먹고 만족하는 순간 완성된다고 믿는다.
초밥 주는 이색 고깃집으로 변신
사또화로구이는 주변으로 경쟁점이 늘어나며 차별화를 주고자 올해 2월부터 대대적인 변신을 감행했다. 기소야에서 배운 일식을 고깃집에 접목하면 어떨까 생각해 작년 12월 구상을 끝냈다.
메뉴를 단순화시키고 반찬으로 초밥을 제공한다. ‘초밥주는 고깃집’이란 컨셉을 잡고 반찬보단 하나의 요리 개념으로 상차림을 해준다. 오히려 손님들이 남는 게 있냐고 물을 정도로 구성이 푸짐하다.
“매장에 변화를 준 건 그동안 손님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음식점을 선택할 때 손님은 가성비를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운영하는 점주 입장에서는 실천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멀리 봐야 장수하는 가게가 될 수 있다.”
초밥주는 고깃집으로 변화를 준 후 사또화로구이는 손님의 방문주기가 더 짧아졌다. 재방문율이 70%가 넘는다. 메뉴를 가볍게 하니 회식 장소 이미지가 강하던 매장에 2인 손님 또한 부쩍 늘었다. 단체 손님이 아니면 원가율이 높아지나 사또화로구이 맛과 서비스에 만족해 주말에 가족과 동반해 다시 찾는 이들도 많다.
사또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지키고 싶어
사또화로구이는 올해로 문을 연지 14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보면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이다. 본사의 지원을 받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조차 평균 수명이 5년 미만인 우리나라 외식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장수 매장이라 할 수 있다.
최 대표는 여전히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뛴다. 사또화로구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시흥에서 버티고 싶다는 바람이다. 손님에게 더 베풀고자 고기를 추가하면 확실한 보답을 해준다. 메뉴에는 없지만 최 대표가 배운 오니기리(주먹밥), 당고 등을 서비스로 제공하기도 한다.
끝으로 “외식업계에 처음 들어왔을 땐 내 가게를 가져보는 게 꿈이었다. 항상 똑같이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는 뜻있는 젊은 청년을 발굴해 키워보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가지고 있다. 환갑을 넘겨 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래도 잘 살았네’라 말하며 웃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