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작가들의 그릇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상 속에 ‘미美’를 스며들게 하거나 ‘다이닝’을 완성시키는 그릇.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실용품임과 동시에 그 이상의 아름다움까지 갖춘, 탐나는 물건인 그릇 말이다.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릇’ 하면 무미의 양산 제품이거나, 고가의 해외 명품, 아니면 갤러리에서나 살 수 있는 작가의 ‘공예품’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중간 즈음에서 간격을 메우는 듯한, 생활자의 눈높이로 미적인 가치와 실용성을 겸비한, ‘아름다운’ 작가 그릇이 우리 주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호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그릇’전展에 이어, 이번에는 국내 도예·공예 작가의 신상(?) 그릇전을 기획하며 그들의 주요 작품을 스튜디오에 모았다. 소재와 기법에 따라 도자, 유리, 옻칠 등 세 가지로 분류하고, 전통파 중견 작가부터 독특한 미감의 젊은 아티스트까지 엄선했다.
한 줄의 기사보다 한 개의 그릇을 더 보여주고 싶은, 22명 작가의 19개 브랜드 그릇들을 지금부터 소개한다.

1. 백자의 운치와 기품 ‘이소요’
얼핏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깊은 기품이 깃든 조선백자. 현대의 백자를 논할 때 이기조 도예가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작품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두 차례 출품해 모두 낙찰되기도 했다.
그가 처음부터 백자에 몰두한 것은 아니다. 교수로 부임한 이후 관심이 전통 도자기로 향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백자를 연구했다. 열띤 조사와 작업을 반복한 끝에 비로소 그만의 작품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도자 브랜드 ‘이소요’의 그릇은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자연감이 있다. 아니 오래 볼수록 더 아름답다.
흰빛 속에 옥색이 은은히 감도는 색감은 음식의 색과 모양을 자연스럽게 받아낸다. 그래서일까, 정갈한 한식과 특히 어울리는데 여러 한식 다이닝에서도 그의 그릇을 찾는다. 전통의 기품과 실용성을 모두 갖춘 백자 그릇은 중견 도예가가 세월을 바친 연구의 산물이다.

조선백자의 미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거장 이기조 도예가의 브랜드. 부드럽고도 우아한 선의 식기는 무광, 유광 라인으로 구성되며 전통 백자의 기품과 실용성을 두루 갖췄다.

2. 색채와 형태의 실험 ‘이정미’
선명한 파랑, 우아한 바이올렛, 편안한 그린, 은은한 민트. 이정미 도예가의 컬러 팔레트는 실로 다채롭다. 형태는 또 어떠한가.
접시 테두리에 레이스를 두르고, 잔 손잡이 대신 나비 날개를 다는가 하면 식탁 위에 커다란 반달을 띄운다. ‘손맛’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형태에는 조형미가 서려 있다.
초창기에는 순수 미술과 실용 공예품 작업을 오가던 이정미 작가는 어느 순간부터 방식을 나누지 않고 조형미와 실용성을 모두 갖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예컨대 테두리가 나뭇잎을 닮은 레이스 시리즈는 조형 시 흙을 떼고 덧붙이는 과정에서 저절로 나타난 면을 살려낸 결과다. 고온에 굽는 과정에서 결정유를 피우고 도자에 균일한 색을 입히기 위해 옻칠을 하는 것 역시 강렬한 효과를 낳는다. 그의 그릇은 들여다볼수록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조형미가 살아 있는 그릇을 빚는 도예가. 현재 경기 이천에서 작업을 해나가고 있으며, 색채와 질감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3. 눈처럼 아스라한 빛깔 ‘해인요’
흰색은 무無를 뜻하는 색이지만 백자의 빛깔은 오묘하다. 예컨대 해인요의 그릇에는 푸른빛이 서려 있어 아스라하면서 포근하다.
조선백자의 미감을 반영해 재해석하는 김상인 작가는 눈처럼 흰 빛깔을 추구한다. 경남 산청과 합천의 카올린 백토를 수비(흙과 물을 섞어 곱게 거르는 작업)하여 기존 백자토와 혼합하는데, 이상적인 설백雪白의 색과 질감을 찾고자 실험한 결과다.
그는 전통 기법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직접 요리하거나 셰프들과 대화하며 현재 식문화에 맞는 형태를 고민한다. 절제라는 백자의 미덕을 체화해서일까. 작가는 그릇을 만들 때 무엇보다 기능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무게, 음식을 담는 공간, 쌓는 방법 등 생활에서의 활용이 우선인 것이다. “하지만 그릇의 입체감 있는 형태와 고유한 질감은 식탁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습니다.” 단정하고 흰 그릇에는 어느덧 영감이 채워진다.

조선백자의 미감과 기법을 계승하여 현대 식생활에 맞게 재해석한 그릇을 빚는 김상인 작가의 도자 브랜드. 내년에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새로운 청화백자 라인을 준비하고 있다.

4. 면과 선의 흐름 ‘조신현 도예 연구소’
고요한 백자의 여백 위로 유연하게 흐르는 선. 도예가 조신현의 ‘선의 흐름-반상기’는 푸른 색의 수많은 선이 반복되는 형태를 통해 단순하면서도 기품 있는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낸다.
반상기는 밥그릇, 국그릇, 찬기와 종지로 구성된 세트로, 격식을 갖춘 밥상을 위한 한 벌의 그릇을 뜻한다.
백자 테두리에는 청색의 선을 두르고 절제된 장식으로 여백의 미를 살리고자 했다. 머그컵은 2007년 청주공예비엔날레 출품을 시작으로 실용적인 형태를 고민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 본체는 백자의 오묘한 빛감이 도드라지고 손잡이에는 서로 다른 색상의 흙을 켜켜이 쌓은 후 면을 조각하는 역상감 기법을 적용했다. 겹
치는 흙판의 색깔과 조각하는 면의 형태에 따라서 각기 다른 무늬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조신현의 도자 제품들은 작품성과 실용성 사이, 흐르는 선을 따르듯 생겨나고 확장된다.
다양한 선과 색의 반복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조신현 작가의 작품은 기존 도자 성형의 틀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식기를 비롯해 도자를 활용한 다양한 아트오브제와 공예 가구도 제작한다.

5. 깨어진 조각의 파편 ‘아뜰리에 수’
‘Space, Ornament, Object’의 철자를 딴 아뜰리에 수SOO는 ‘공간을 장식하는 오브제’라는 모토를 가지고 실용적인 쓰임새와 더불어 장식품이 되어줄 예술적인 그릇을 선보인다. 매트하게 처리한 흑백 면을 따라 금박 테두리로 포인트를 준 ‘피스PIECE 시리즈’ 세트는 조선 시대 도자 기법인 ‘면치기’를 재해석해서 만들었다.
이는 적당히 굳힌 흙을 날카로운 도구로 반듯하게 깎아내 표면을 비정형적으로 장식해내는 기법이다. 깨진 파편처럼 조각된 피스 시리즈를 통해, 전통 기법을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에 어울리는 모던한 형태로 재현하고자 했다. 원형 플레이트는 이 같은 비정형의 패턴을 적용해서 그 위에 은을 입히고 수공예 음각 장식을 넣어 완성했다.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소용돌이 문양에는 사용자에게 활력을 전하는 일상 속 예술품으로 오래 사랑받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전통적인 도자 기법을 활용해 형태의 재해석을 담는 이상호 작가의 스튜디오. 흙과 유약이 주는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공예적인 그릇을 만들어왔으며 앞으로는 순수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오브제를 중점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미식, 그릇을 탐하다 공예가 편-2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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