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은 한식, 그 얼굴이 점점 다채로워진다. 이제 한국 셰프들은 현지와 교감하며 한식의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
전통과 재해석, 유년의 기억과 현지의 미각,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 그들의 도전 속에서 한식의 오늘을 읽는다.

뉴욕에서 펼치는 김치의 혁신
라온 - 임수길 셰프
올 3월, 세계 최초의 김치 페어링 파인 다이닝이 뉴욕에 등장했다. <라온>이 그 주인공. 임수길 셰프는 뉴욕 CIA를 졸업하고 프렌치 레스토랑 <대니얼>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셰프를 지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한식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프랑스 요리를 배울 수는 있지만, 진짜 맛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어요. 한식 이라면 그 맛과 문화를 제대로 알릴 자신이 있었어요.” 이후 2018년 뉴욕 이스트빌리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수길>을 오픈하면서 그 꿈을 이뤘으나, 당시 한식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뿐더러 값싸고 푸짐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해 타파스 형태의 캐주얼한 프렌치-코리안 다이닝으로 출발했다.
상황이 변한 건 팬데믹이 극성이던 2021년 즈음. 과감히 도전한 테이스팅 코스로 손님은 물론,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프렌치-코리안을 넘어 ‘진짜 한식’의 깊이를 보여줘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렇게 오픈한 <라온>은 한식의 근간인 발효, 그중에서도 김치에 주목한다. ‘설렁탕에 깍두기’, ‘보쌈에 겉절이’, ‘짜장면에 파김치’처럼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김치 페어링 공식을 디저트를 제외한 모든 코스에 적용하고,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먹는 방법을 소개하며 세계인이 한국 식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한다.
최근 뉴욕 내 한식의 위상은 어떤가.
요즘 맨해튼에서 한식 파인 다이닝이 대세다. 한국에 대한 관심과 호감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한식의 위상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김밥, 김, 김치는 슈퍼 마켓에서 흔한 재료가 됐다.
맨해튼 어퍼이스트에 레스토랑을 오픈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어퍼이스트는 뉴욕의 대표적 부촌이다. 한식이 고급 요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위치가 주는 맥락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라 온> 오픈 당시만 해도 한식당이 맨해튼 한인타운과 미드타운에 밀집했는데, 최근 어퍼이스트에 한국식 바비큐 전문점이 오픈하는 등 이제는 맨해튼 곳곳에서 한식당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왜 김치였나.
어릴 적 어머니는 김치를 담그고 나면 “부자가 된 기분이야”라고 말씀하셨다. 김치만 있으면 어떤 요리든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치는 한국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음식이자, 고향과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3000년 이상 이어온 역사 속에 개성 보김치, 장김치 등 종류가 다양하고, 경상도에 서는 김치와 생선의 궁합을 즐기는 등 지역별로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김치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보여주고 싶었다.
대표 메뉴를 소개한다면.
개성 보김치를 재해석한 ‘뉴욕 보김치’. 개성과 뉴욕이 경제·무역 중심지라는 공통점에 착안한 메뉴다. 문어, 전복, 랑구스틴, 수박무 동치미, 한국 배를 조합한 보김치에 동치미 육수를 붓고, 단독으로 제공한다. 동아 시아 무역 중심지였던 고려 개성에서 즐겨 먹던 ‘럭셔리 김치’로, 한반도에 고추가 수입되기 전인 16세기 이전에 개발되어 맵지 않다고 설명하면 매우 흥미로워한다. 동치미 육수를 먹다 “접시를 거의 핥을 뻔했다”며 민망해하는 손님도 있는데, 그릇을 들고 육수를 마시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며 한국 식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길 수있도록 안내한다.
요리의 영감을 어디에서 얻나.
주로 어릴 적기억이다. 현재 선보이는 메뉴 ‘고추장 크러스트를 곁들인 할리벗’도 유년 시절 먹었던 민어 고추장 구이에서 착안한 것이다. 고춧가루와 마늘, 버터, 베이컨으로 만든 고추장 크러스트를 활용한 다. 고추장의 매콤달콤함에 짭짤한 풍미를 더해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여기에는 막 담근 총각김치를 페어링한다.
프렌치 테크닉으로 한식의 맛을 낼 때도 있는데, ‘관자 된장찌개’가 대표적이 다. 디포리를 넣은 다시 육수와 캐러멜라이즈드 어니언을 넣은 국물에 정관 스님의 7년 숙성 된장을 풀어 찌개 육수를 만들고, 바삭하게 구운 감자를 동그랗게 말아 가운데 관자와 버터넛스퀴시를 채워 넣은 후 송이버섯을 올린다. 익숙한 해물 된장찌개 맛이지만, ‘된장찌개는 평범한 음식’이라는 선입견을 깨고자 모던하게 플레이팅한다. 여기에는 재해석한 토마토 김치를 곁들인다.
한국 식재료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
뉴욕에서 요리를 시작했을 당시와 비교하면 인식이 매우 높아졌다. 처음에는 김치 냄새를 낯설어할까 걱정돼 메인 재료 안에 넣으려고 했으나, 미국인 직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따로 낸다. 본래 김치와 <라온>이 재해석한 김치의 형태를 비교할 수 있도록 뉴욕에서 활동하는 전성원 작가와 협업한 김치 브로셔를 제공하고 설명을 곁들이는데, 적극 적으로 배우려는 손님의 모습을 보며 김치에 대한 호불호는 취향이 아니라 이해의 영역임을 알게 됐다. 또한 예전에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을 때 이웃이 냄새를 싫어할까 걱정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 뉴욕에서 된장은 경험하고 싶은 식재료다. 관자 된장찌개를 내기 전에 정관 스님이 만든 생된장을 테이스팅하도록 건네면 특별한 경험이라며 좋아 한다. 블루 치즈 같다는 반응이 많다.
주류 페어링은 어떻게 준비하나.
<정식 뉴욕>과 <퍼 세>를 거친 김학수 소믈리에, <주아> 를 거친 린지 소믈리에가 한국 술을 적극 활용한 다. 올 추석에는 한인 교포 앨리스 전 대표의 한국술 양조장 ‘하나 막걸리’와 협업한 페어링을 준비 했다.
뉴욕 보김치에 약주, 우니 김밥과 장김치에 배럴 숙성 약주, 가리비 된장과 토마토 김치에 옹기 5년 숙성 약주, 송이 솥밥과 동치미에 탁주, 디저트 플래터에 사워 체리를 활용한 쌀 맥주 ‘벗주 Beojju’까지 6코스에 한국 술을 페어링했다. 막걸리, 테킬라, 라임을 조합한 ‘페르멘타 리타’, 고춧가루 메스칼을 활용한 ‘깐부’ 등 한국적인 칵테 일과 함께, 오미자를 넣은 ‘앰버스 리지’ 등 논알코올 음료도 선택할 수 있다.
음식 외 한국적인 요소를 소개한다면.
1970년대 한국 미술 운동인 단색화에 영감받아 차분한 색상, 나무와 돌 등 천연 소재를 활용해 절제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자개와 금의 화려 하고도 단아한 그러데이션이 돋보이는 아티스트 수지 태경 김의 작품 ‘집단적 열정 Collective Ex uberance’으로 포인트를 줬는데, 순우리말로 ‘즐거움’을 뜻하는 업장명을 표현했다. 한국 장인의 작품을 큐레이션하는 ‘식기장’과 권은영, 김윤 지, 이운경 등 젊은 작가의 식기, 이천 토토 스튜디 오의 소주잔과 전통 유기 식기 등 한국적인 멋을 지닌 다이닝웨어를 사용한다.
해외에서 한식을 선보이는 셰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현지 재료와 입맛을 고려하되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녹여낸 요리를 하면 좋겠다. 한식을 알린다는 무거운 사명감으로 전통을 고집하기 보다는, 익숙함과 낯섦, 독창성이 공존하는 한식을 만들 때 현지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 한다. 또한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 때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요리 테크닉을 배우길 권하고 싶다.
앞으로의 목표는.
본질을 간직하되 시대의 변화에 맞는 한식을 만드는 것.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함께 전하며 공감을 얻는 것. 이를 위해 앞으로도 한식 공부를 계속 이어나가려고 한다.
- Raon NYC
- 207 E 59th Street, New York, NY 10022, Unites States of America
익숙함 속에서 다시 피어난 한식
레스토랑 키 - 김기용 셰프
최근 미식 도시로 부상 중인 로스앤젤레스. 올해 「미쉐린 가이드」 에디션에서 첫 3스타 레스토랑이 등장한 가운데, 오픈 5개월 만에 1스타와 영 셰프 어워드를 동시에 받은 <레스토랑 키> 김기용 셰프가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김기용 셰프는 한식과 일식, 양식을 조화롭게 융합해 자신만의 요리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라이징 스타다.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대학 진학 후 적성에 맞지 않는 저널리즘 대신 요리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시 레스토랑 <마츠히사> 를 시작으로 <베누>, <정식 뉴욕>, <아토믹스>, 이탤리언 레스토랑 <블랑카>, 직화 요리 기반의 컨템퍼러리 레스토랑 <메테오라> 등 다양한 퀴진을 경험하고 그가 내린 결론은 한식.
“한때 스시 장인을 꿈꾼 적도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한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식 뉴욕>에서는 한식을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방식을, <아토믹스>에서는 한 편의 공연 같은 디너를 설계하는 방법을 배웠죠.” 들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토마토와 깻잎 소르베’나 ‘겨울 트러플을 얹은 들깨 파스타’부터 페루 고추로 이국적인 킥을 더한 ‘물회’, 사골의 녹진함을 담은 ‘한국식 뼈 육수와 황금 비트 주스를 곁들인 45일 건조 숙성 젖소’까지. <레스토랑 키>의 요리는 세계 각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중심에는 한식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로스앤젤레스 내 한식의 인식은 어떤가.
로스앤젤레스는 한국인 이민의 역사가 긴 도시인 만큼 한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시대별로 유행한 한식이 당시 모습 그대로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최근 2-3년간 한국 문화 전반이 하나의 브랜드로서 인기를 얻으면서, 이미 익숙한 한식에 대한 관심도 다시 한번 눈에 띄게 높아졌다. 맛있고 재미있는 음식이라고 여겨 한식당이 회식 장소로도 인기다.
로스앤젤레스에 레스토랑을 오픈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이 높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한식이 이국적인 음식이 아니라 이곳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 을 엿봤다. 지금은 문을 닫은 첫 레스토랑 <킨>을 로스앤젤레스에 오픈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시 레스토랑 <가네요시>에서 식사하던 중 지하 공간에 레스토랑을 오픈하지 않겠 냐는 제의를 받았다. 자매 레스토랑으로서 많은 도움을 주신 덕에 지금의 <레스토랑 키>를 오픈할 수 있었다.
한식을 소개할 때 가장 신중하게 고려한 요소는.
현지인이 알고 있는 한식의 맛과 기억을 기반으로 새로운 레이어를 더해 자연스럽게 한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한다. 익숙함과 새로 움이 공존하는 요리가 감동을 깊은 준다고 생각한 다.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존중하는 한식의 담백 한 멋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한다. 또한 도시 일부 지역에선 ‘한식은 저렴한 무제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아직 남아 있는데, 파인 다이닝의 문법 안에서 정교한 재료 선택, 정확한 테크닉, 충분한 설명을 통해 한식도 고급스러운 음식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대표 메뉴를 소개한다면.
계절과 영감에 따라 메뉴를 수시로 바꾸는데, 현재 대표 메뉴는 ‘회’ 다. 6개월 숙성 묵은지를 씻어 얇게 저민 보스턴산 참치 머릿살 회로 감싸고, 참기름과 소금을 더한 뒤 프랑스산 트러플 슬라이스를 올려 완성한 다. 한식은 나만의 ‘재료 조합’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는 요리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회와 묵은지의
조합을 재해석했다는 소개를 곁들인다. 묵은지를 처음 접하고 김치의 다양한 종류에 놀라는가 하면, 트러플을 한식에 접목한 시도가 신선하다는 반응이 많다.
요리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
먹고 마셨던 경험을 조합하는 편이다. ‘캐비아와 청주 크림을 곁들인 구운 상추 아이스크림’은 제가 좋아 하는 구운 상추를 활용한 메뉴다. 뉴욕 <아스카> 에서 아스파라거스 아이스크림과 캐비아를 경험 하고, 캐비아와 발효 향을 지닌 크림을 곁들인 채소 아이스크림을 구상했다. 약주 크림의 약간 달달한 맛이 구운 상추 아이스크림의 은은한 흙 내음과 잘 어울린다. ‘대구 정소 김밥’은 제가 좋아하 는 한식인 김밥, 그리고 밥과 반찬의 조합을 함께 소개하고자 개발한 메뉴다. 대구 정소는 주로 해물탕에 사용되지만, 밥에 올리고 김으로 싸서 먹으면 정말 맛있다. 밥과 반찬 개념이 낯선 손님에게 함께 먹는 조합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한국 식재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한국 산나물과 제철 해산물을 신선한 상태로 공수 하기 어렵다. 대신 일주일에 세 번 파머스 마켓에서 구한 제철 채소로 현지의 풍미와 개성을 살린 새로운 한식을 만들고 있다. 또한 낯선 식재료에 거부감이 적은 도시인 만큼 비둘기, 오리, 멧돼지, 양고기 등 다양한 육류를 활용한다.
해외에서 한식을 선보이는 셰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한식은 강력한 힘을 지닌 우리 문화다.
자신감을 가지고 한식의 철학과 깊이를 현지의 언어로 풀어내면 좋겠다.
앞으로의 목표는. 현지인이 공감할 수 있는 맥락과 가치를 간직한 한식을 만들고, 그를 통해 바쁜 현대 일상 속 행복을 전하는 것. 가격대가 높은 파인 다이닝은 고객층이 한정된 편이라, 앞으로 접근성이 높은 공간을 마련해 더 많은 손님에게 한식을 통한 회복의 경험을 전하고 싶다.
- Restaurant Ki
- 111 San Pedro st. Los Angeles CA 90012, Unites States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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